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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 52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것

오랜 친구인 대학원생 친구 A를 만났다. 증권사에서 2년 간 일했던 이 친구는 30대 중반 주간 박사과정생이다. 증권사 RA로 일했던 그는 밥 먹듯 야근을 하곤 했었다.

 

난 회사원 시절 A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집에 귀가도 잘 못 해 항상 후줄근 한 모습이 눈에 띄곤 했다. 그런데, 생체 리듬이 '대학원생'에 맞춰진 그에겐 요즘 기업들이 시행한 '주 52시간'이 뭔가 동떨어진 얘기일 거 같았다. 법정시간으로 주 52시간 상한제. 그러니까 일주일 간 주 52시간만 근무하는 덕분에 퇴근시간이 앞당겨진 것이다. 왠지 A 가 격세지감처럼 느낄 것 같았다.

 

나 = "주 52시간이라고 들어봤어? 요즘 회사원들 퇴근 빨리 한다. 9 to 6, 이런 게 조금씩 정착하잖아. 너 몇 년 전에 회사 다닐 때 단 한 번이라도 오후 6시에 칼퇴근 한 적 있어?"

A = "당연히 없지. 6시에 저녁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었겠다. 뭐, 이제 회사원들도 나름 저녁 있는 삶이 가능해진 건가. 회사 다닐 만하겠는데?"

 

A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A= "그런데, 주 52시간이 되어서 네 일상에 뭐가 달라졌어?"

 

내가 답했다.

"많이 달라졌지. 일찍 퇴근하면 아내랑 저녁도 먹고, 아가 볼 시간도 생기고 말이야."

A = "아니. 너를 위한 시간이 생겼냐는 말이야."

나 = "그, 글쎄? 뭐 사실 충분한 저녁 시간을 확보한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네? 회사 선배들 조언처럼 스크린 골프라도 나가볼까도 싶네?"

A = "스크린 골프가 진정 네 삶을 위한 거야?"

 

여기서 살짝 말문이 막혔다. A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그가 나에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A = "야근이 가득했던 삶은 말이야. 직장인들에게 '기능'을 강조했어. 무슨 말인지 알아? 아내랑 오붓하게 저녁 먹고, 육아도 하고. 물론 이런 건 남편이자 아빠로서 '기능'이지, 이게 바로 너를 위한 시간일까?"

나 = "계속 말해봐."

A = "한국 사람들은 말이야. 사회적 기능, 즉 야근에 쫓기다 보니 집에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어. 그러다가 그나마 주어진, 그 짧은 가정 생활 동안 넌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기능하도록 요구받은 거야. 그러다 보니 진정한 목적을 까먹는 거지."

 

나 = "진정한 목적이라면?"

A = "이를테면 이런 거지. 시를 읽고, 악기를 연주하고, 소설책에 푹 빠지고. 너 이런 거 생각해봤어? 물론 나도 직장인일 땐 생각도 못 했지. 그런데 말이야. 일찌감치 대학원생이 되어 원 없는 휴식 시간을 가져보니, 어느새 진정한 나를 위한 시간을 갖게 됐어."

 

A와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아주 오래전에 봤던 영화 '죽은 시인들의 사회(1990년작)'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영화에서 키팅 선생은 의사, 법률가가 되기 위해 애쓰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의학, 법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사랑, 낭만이 너희들의 삶의 목적인 거야."

진짜 자신의 꿈을 만날 기회가 없던 학생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한 마디였을 거다. 분명히, 10대 시절 이 영화를 여러 차례 관람했던 내게 이 영화 속 한 마디는 왜 이제 와서 와닿기 시작한 걸까. '삶의 목적'에 대한 키팅 선생의 한 마디는, 약 20년 뒤 부메랑처럼 날아와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정부가 도입한 주 52시간은, 기능적 목적만을 충족시키며 산 우리에게 갑작스러운 휴식을 줬다. 그러고보면 내게는 직장생활, 그리고 남편이자 아빠의 삶 외로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할 여유가 그동안 없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제 와서 삶의 목적을 고민해야 하는, '즐거운 혼란'이 주어진 셈일 수 있다.

 

'야자'로 대표되는 학교생활, 2년의 군대, 그리고 살벌했던 취업전쟁까지…. 우리는 오로지 한국 사회의 환경에 맞춰, 주어진대로, 기능에 맞춰 삶을 살았다. 삶과 목적을 즐기던 법을 친절히 알려줬던 영국인 키팅 선생의 말마따나, 우린 이제라도 진정한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을까.


우먼스플라워 에니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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