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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50대 문과생과 30대 문과생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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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먼스플라워는 직장인의 애환과 자기계발을 다룬 '에니시의 직장비사'를 연재합니다.

 

강남 길거리에서 A 차장을 만난 것은 아주 우연의 일이었다. 그와 나의 인연은 이렇다. 난 첫 직장에서 A 차장을 만났다. 내가 수습사원이던 시절, 그는 한 부서의 중책으로 부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몇 번 승진을 물을 먹었다. 더 이상 조직에서 버티지 못했다. A 차장은 이후 몇 번의 이직을 거듭한 끝에 현재 한 중소업체의 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선배님. 저 에니시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그가 화답했다. "어이, 오랜만이야." "강남역에서 귀가하시는 광역 버스 타시려나 봐요. 한번 날 잡고 술 먹어요."


그렇게 우린 정확히 한 달 후 한 고깃집에서 만났다. 여기서 잠깐. 스무 살 터울인 나와 A 차장은 여러 공통점이 있다.


1. 일반 사무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 어학연수 경험 덕분에 둘 다 나름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고 있다.


3. 둘 다 문과생 출신이다.


그날 우리의 대화는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 가정, 육아 등의 평범한 주제였던 우리 대화는 어느새 무거워졌다.


"너나 나나 처음에 기업 입사했을 땐 꿈이 있었잖아." 그가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 나, 말만 부장이지, 지금 현장에서 영업 뛰어. 기술 없고 자격증 없는 문과생 출신은 말이야. 말년이 될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 되거든. '영업 뛰든가, 치킨집 차리든가.' 그나마 영업 뛸 수 있는 '자리'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뭐 전국에 문과생 출신이 세고 셌어? 나하고 너만 영어 잘하나? 요즘은 다들 잘하지."


거침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A 차장의 주름은 깊어만갔다. 그의 요지는 이랬다. 40대를 거쳐 50대가 되면 '영업'과 '인간관계'가 전부인 세상이 온다. 아직 대중에겐 피부로 와 닿지 않는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할수록, 이과 출신 엔지니어와 과학자 같은 이들의 대우는 높아지는 반면 우리와 같은 문과생들의 선택의 폭은 갈수록 좁아진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현실을, A 차장은 온몸으로 겪고 있는 것이었다. 

 

약 2시간의 저녁 식사에서 그는 스무 통이 넘는 영업 관련 전화를 받았다. 우리의 대화는 수도 없이 중단됐고, 재개되길 반복했다. 전화 통화를 엿들어보니, 대다수의 경우 그는 부탁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전화 너머 누군가에게 바짝 엎드리는 게 그에게 일상이자 습관이 됐다.


전화를 마친 A 차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도 30대인 너는, 아직 기회가 있잖아. 대학원 다녀? 학위라도 있으면 좋고. 아니면 주말에 공부라도 해서 자격증이라도 따. 아저씨 미래가 내 지금 모습이면 안되잖아." 여기까지가 기억에 남는 A 차장과의 대화다.


A 차장과의 대화는 내게 많은 여운을 남겼다. 한때 부서를 주름잡던 A 차장의 패기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지금은 거래처에 쩔쩔매며 체면을 구기는 말년 샐러리맨일 뿐이었다. 시선을 주변으로 돌려보면, 난 수많은 후배 문과생들이 진로를 위해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컴퓨터공학을 복수 전공하는 정치외교학도 A 후배, 어문학을 전공했다가 취업에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2년제 기술학교에 재입학한 20대 후반 B 후배까지…. 어쩌면 이런 시도들은, 문과의 한계를 일찌감치 가운데 기울이는 변화의 노력인 걸까. 불과 10년 전, 낭만적인 글 쓰는 걸 좋아하며, 풋풋한 에세이 읽는 걸 취미삼았던 문과생들의 현실은 경제 불황과 시대의 변화 앞에 차갑게 식고 있었다. 20대보다 변화의 기회가 더 큰 폭으로 줄어든 30대, 즉 나의 현실은 어떨 것인가. 이건 내게도 새로운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0년 만에 마주한 그의 쓰라린 현실적 조언에 보답하기 위해, 난 기꺼이 그날 소고기값을 냈다.

 

우먼스플라워 에니시 칼럼니스트